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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시말리즘 이야기
    2021년 FINANCE 2021. 10. 14. 13:59

    우크라이나 사태가 극단으로 치닫자 독일과 프랑스가 발 벗고 중재에 나섰습니다. 서방의 온갖 제재와 협박에도 러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갈 때까지 가보자는 자세를 취했지요. 돌아보면 인류 역사에서 러시아는 항상 가장 천천히 그리고 가장 나중에 변했지만, 일단 한번 변하기 시작하면 누구도 가지 못하는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지요. 유럽에서 가장 오랫동안 버텨오던 러시아의 봉건 전제주의를 무너뜨린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세계를 혹독한 냉전으로 옥죄었던 소련 체제를 무너뜨린 페레스트로이카는 그야말로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지각변동을 일으켰습니다.

     

    문화사에서는 러시아인의 이러한 극단적인 성격을 '막시 말 리즘'이라 부릅니다. 뭐든지 한번 하면 중간이 없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 Maximum, 즉 최대치까지 가고야 마는 성격을 이르는 말인데요. 러시아인의 이러한 특성은 개인의 성격에서부터 사회, 정부, 국가 차원까지 다양하게 나타나서 러시아인과의 개인적인 교제 차원에서부터 회사 간 비즈니스, 나아가 국가 간 외교에서 반드시 참조해야 할 요소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인의 막시 말 리즘이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러시아 미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인데요, 앞으로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술 작품들을 통해 보다 쉽고 자연스럽게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더더욱 매력적인 러시아인의 막시 말 리즘을 이해하는 포스팅을 써보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인 1915년에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가 그린'검은 사각형'이라는 작품의 가격은 얼마일까요? 말레비치는 4개의 '검은 사각형'을 그렸는데요, 그중 3개는 바로 혁명 후 소련의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미술 시장에서 거래된 적이 없고 가장 마지막에 그려진 가장 작은 '검은 사각형'이 유일하게 거래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1932년에 그려진 마지막 ‘검은 사각형’은 말레비치의 처형의 손녀가 남몰래 보관하고 있다가 1993년에야 대출 담보물로 은행에 맡기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이 은행이 도산하면서 2002년에 처음으로 경매 시장에 등장했습니다. 당시 경매 시장에서의 추정 가격은 5천만에서 8천만 달러에 이르렀지요.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이 그림의 외국 반출과 경매 거래를 즉각 중단시킨 후 그림은 러시아 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요, 이 기증을 위해 한 러시아 갑부가 은행에 지불한 지극히 상징적인 가격이'백만 달러'였습니다.

     

    한편 말레비치가 최초의 ‘검은 사각형’ 이후에 그 아류작으로 그렸던 1916년 작 ‘절대주의 구성’이 2008년 11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약 6천만 달러에 낙찰되었으니 실제로 그의 대표작인 최초의 ‘검은 사각형’의 가격이 얼마 정도일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 단순한 그림이 이리도 엄청난 가치를 호가하는 걸까요? 미술 전문가들은 한마디로'이 단순한 그림을 그리기는 쉬우나 아무도 생각해내지는 못했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일종의 '콜럼버스의 계란'이라는 것이지요. 콜럼버스에게 손을 대지 않고 계란을 세우는 과제가 주어졌다면 20세기 초 말레비치에게는 어떤 과제가 주어진 것일까요? 어떤 과제에 대한 대답이기에 이 단순한 검은 사각형에 무려 8천만 달러라는 가격이 매겨지는 것일까요?

     

    잠시 짧은 서양 미술사 여행을 해볼까요? 14세기부터 본격화된 르네상스 미술은 원근법을 무기로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을 화폭에 최대한 똑같게 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로 약 5세기 동안 서양 미술은 대상의 재현이라는 과제에 매달렸다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을 최초로 깨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인상파 화가들이었습니다. 튜브 물감의 등장으로 오랜 시간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면서 빛의 강도와 각도에 따라 색깔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을 보고 대상의 고유한 성질, 나아가 대상 자체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한 것인데요.

     

    곧이어 등장한 세잔은 그 유명한 정물화를 통해 화가의 다양한 시각에 따라 비틀어지고 왜곡되는 대상의 모습을 담아내었고, 이 세잔의 다시점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피카소는 대상을 수많은 큐빅 즉 입방체로 분해해내고 다시 임의로 종합하는 큐비즘을 창시해 냈습니다. 칸딘스키는 더 나아가 대상을 직접 표현하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인간 영혼의 정서적 반응을 색깔과 형태로만 나타내어 최초의 추상화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지요. 몬드리안은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사각형들을 통해 수직과 수평의 만남으로 구성된 대상 세계의 보편적 원리를 표현했습니다. 현대미술의 발전은 한마디로 대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인상파에서 몬드리안에 이르는 현대 화가들은 모두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결코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르네상스의 큰 틀, 대상의 재현에 대한 미련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대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극단까지 최대한으로 몰고 간 것이 바로 말레비치입니다.

     

    그는 이제 모든 대상을 불태워 검은 사각형 안에 매장시키고, 동시에 모든 과거의 미술과 문화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그 순수한 無위에서 출발해야만 진정한 창조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검은 사각형’이야말로 세계 미술사 최초의 ‘순수한 창조’라고 주장했는데요. 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기존의 미술이 대상을 베끼는 ‘기술’이고 그 주체인 화가는 '장인'에 불과했다면, 모든 대상을 부정하고 그 위에 서는 것, 이것을 말레비치는 수프레마티즘(절대주의)라고 선언합니다. 라틴어로 ‘Supre’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모든 것 위에 있는’이라는 뜻이지요. 검은 사각형을 통해 말레비치는 ‘나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그 속엔 존재하는 어떤 것도 없는 최고의 예술이다’라고 말합니다.

     

    대상에 대한 거리 두기를 극단으로 밀어붙여 대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막시 말 리즘'. 바로 말레비치의 이 막시 말 리즘에 의해서 비로소 본격적인 현대미술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미술사의 혁명이 시작된 1915년으로부터 겨우 2년 뒤에 전 세계를 뒤흔든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러시아 미술을 통해서 러시아인과 러시아인의 역사, 나아가 인류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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