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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닥터 지바고의 작가 파스테르낙 이야기
    2021년 FINANCE 2021. 10. 14. 13:43

    죽음의 시대에 생명에 대한 사랑을 예술로 승화한 <닥터 지바고>는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으로 선정되고 당시 68세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낙은 이를 수락합니다. 그러자 소련 정부는 그를 국가에 대한 배신자로 간주하여 작가 동맹에서 축출하고 급기야는 시민권 박탈과 국외 추방을 선고하는데요. 결국 파스테르낙은 노벨상 수상을 포기하고 흐루시초프 당시 서기장에게 간청하여 국외 추방만은 면하게 됩니다. 그는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국을 떠나는 것은 저에게는 죽음이나 같습니다. ”라고 호소했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조국을 떠나지 않았던 지바고처럼 파스테르낙도 자신의 창작활동을 탄압했던 조국을 노벨상까지 포기하면서 떠나지 않았던 것인데요. 하지만 그는 이후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소설 속 지바고가 그랬듯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사망합니다.

     

    작가 파스테르낙과 소설의 주인공 지바고에게는 매우 많은 공통점이 있는데요, 우선 둘 다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의 쇠망기에 태어나 청년기에 사회주의 혁명을 겪었고 이 혼란의 시기에 굳건하게 독자적인 세계관을 지켜낸 작가였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대세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거기서 결코 도망가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세상의 구원을 꿈꾸었기에 그는 아마 진정한 영웅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을 통해 위대한 영웅의 꿈을 살짝 내비치기도 했지요. 주인공의 ‘性’인 ‘지바고’가 ‘살아있는’이라는 형용사에서 온 것이라면 그의 이름인 ‘유리’는 11세기 기독교의 전설적인 영웅인 ‘게오르기 혹은 조지’ 성자에서 온 것입니다. 고대 러시아에서는 발음상의 문제로 게오르기, 조지를 유리라고 불렀는데요, 유럽의 성화나 문장, 국가의 깃발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을 타고 용을 잡는 기사>가 바로 이 게오르기 성자입니다. 이교도를 상징하는 용으로부터 공주를 구하고 기독교를 전파한 게오르기 성자는 많은 기독교 국가들에서 수호 성자로 모시고 있는데요,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러시아의 국가 문장에도, 동전에도, 그리고 최고의 훈장에도 이 성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파스테르낙은 자신의 주인공 유리 지바고를 통해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꿈을 펼치려 한 것이지요.

     

    소설의 끝에 나오는 지바고의 시 중에 ‘옛날이야기(Сказка)’는 바로 이 게오르기 성자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거대한 뱀은 그녀의 팔을 휘감고 / 목을 친친 감고 / 이 희생물을 고통을 위한 제물로 받았다 /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 탄 기사는 도움을 청하고는 싸우기 위해 창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11세기가 아니라 파스테르낙에 의해 20세기에 되살아난 게오르기의 운명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죽은 용의 시체를 들고 당당히 입성하는 게오르기의 전설과는 달리 이 시에서는 ‘군마와 용의 시체는 / 모래 위에 나란히 쓰러졌고 / 의식을 잃은 기사, / 처녀는 기절했다.’고 묘사됩니다. 용을 잡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정작 구해야 할 여인도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 영웅이지요. 다른 시 ‘가을’에서 ‘아담한 숲의 나무들이 옷을 벗듯이 / 그대도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 그때, 비단 술이 달린 잠옷 바람으로 / 내 팔에 안기려무나.’라고 했던 영웅은 실제로는 자신을 사랑한 여인을 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 ‘봄의 진창’에서 이 여인은 ‘지는 해의 불탄 자리/나뭇가지들이 까맣게 엉킨 사이에서 / 메아리치는 종소리처럼 / 한 마리 나이팅게일은 피울음을 울었다.’고 그려지지요.

     

    이 점에서 닥터 지바고는 사실 셰익스피어의 우유부단한 영웅인 ‘햄릿’에 가깝습니다. 햄릿은 거대한 운명의 힘에 저항하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인 오필리어도 자신도 지키지 못한 불행한 인텔리이지요. 지바고가 남긴 25편의 시 중 제일 첫 시의 제목이 바로 ‘햄릿’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시에서 지바고는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 하지만... 길의 끝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 / 홀로 된 나는 온통 바리새인의 위선 속으로 침몰한다.’고 슬퍼합니다.

     

    그런데 소설 속 지바고의 비극적인 운명은 작가 파스테르낙의 실제 삶에서도 그대로 재현됩니다. 지바고에게는 아내 토냐, 애인인 라라 외에도 라라와 헤어진 후 모스크바에서 만난 마리나까지 세 명의 여인이 있었는데요, 파스테르낙에게도 역시 세 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31세에 열렬한 사랑 끝에 미모의 화가 예브게니아와 결혼했으나 약 10년 후 유명 피아니스트의 아내였던 지나이다와 불륜에 빠져 예브게니아를 버리지요. 그러나 지나이다와의 약 17년간의 결혼생활 이후 파스테르낙은 56세의 나이에 34의 여성 편집인 올가를 만나 다시 금지된 사랑에 빠집니다. 바로 이 올가로부터 라라의 영감을 얻어 닥터 지바고를 집필하게 되지요.

     

    그런데 파스테르낙을 열렬히 사랑했던 이 아름다운 여인들은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첫 부인 예브게니아는 이혼 후 정신병동을 전전하다 결국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다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습니다. 두 번째 부인 지나이다는 마치 지바고의 아내 토냐처럼 남편의 불륜을 감내하며 끝까지 공식적인 아내로 남았지만 남편이 죽은 뒤 작품 출간도 연금 수령도 금지된 상황에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 중병에 걸려 사망했지요. 그리고 파스테르낙이 죽을 때까지 연인으로 그의 창작을 도왔던 올가는 아마도 세 명 중에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파스테르낙의 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다 결국 유산까지 했고 5년간 감옥살이를 해야 했지요. 스탈린 사망 후 풀려난 그녀는 <닥터 지바고>의 완성과 외국 출판을 도왔는데요, 그러나 파스테르낙이 사망한 후 외국 출판사로부터 원고료를 받았다는 이유로 ‘밀수’라는 죄을 뒤집어쓰고 다시 4년간 감옥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거대한 소비에트라는 권력에 오직 펜 하나로 저항했던 영웅 파스테르낙의 뒤에는 그를 그토록 사랑했던 아름다운 나이팅게일들의 서글픈 피울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사의 대변환 속에서 소설과 같은 인생을 살다 간 파스테르낙. 소설 속의 지바고도, 지바고를 만들어 낸 노벨상의 주인공 파스테르낙도 모두 영웅인 게오르기인 동시에 무력한 인텔리인 햄릿이었습니다. 지바고와 파스테르낙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갈리고 있는데요. 참고로 당대 러시아 최고의 여류 시인이었던 마리나 츠베타예바는 ‘파스테르낙은 행복한 사랑을 할 능력이 없는 남자’라고 평가했습니다. 여인의 시각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이런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격동의 시절에 자신의 철학과 예술관을 끝까지 사수한 파스테르낙의 위대한 작가 정신과 이를 헌신적으로 사랑한 러시아 여인들의 숭고함, 그리고 이들의 비극적이지만 위대한 삶에 대한 존경을 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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