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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문학의 매력
    2021년 FINANCE 2021. 10. 14. 13:14

    여러분 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러시아 문학의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까요? 푸슈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홉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문학에 대해 우리는 깊은 애정과 동시에 일종의 경외심까지 느끼는데요. 그 가장 큰 이유는 '어떤 가혹한 현실에서도 결코 인간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위대한 리얼리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등장인물들은 마치 계주 주자들이 바통을 이어가듯이, '인간이 되기는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말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작가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인간으로 남자'는 신념을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가 '부활'과 '죄와 벌'에서 죄지은 인간의 영혼을 구하려 했다면, 체홉은 너무나 지독한 현실에 놓여 있는 불행한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듬어 주려 했습니다. 이 위대한 거장들이 사라진 지 거의 반세기 이상이 지나서 나타난 보리스 파스테르낙에 우리가 열광하는 이유는 그가 오랜만에, 그것도 스탈린 치하라는 지상 최대의 암흑기에 위대한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잇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선 체홉의 냉정한 리얼리즘을 이어갑니다. 1890년에 태어나 1960년에 죽은 파스테르낙은 그야말로 죽음으로 만연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2차 세계 대전,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대에 그것도 그 참혹함이 최고로 집중된 러시아와 소련에 살았지요. 그러나 모두가 이 죽음의 현실을 외면하려고 할 때 파스테르낙은 그의 선배 체홉처럼 용감하게 이 죽음을 정면에서 목도하려고 합니다. 그의 소설 '닥터 지바고'는 체홉의 시대보다 훨씬 더 참혹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라는 죽음의 시대에 던져진 인간들의 서사시이지요.

     

    영화 <닥터 지바고>와 소설 <닥터 지바고>의 가장 큰 차이 중에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는 지바고의 동생 예브그라프가 지바고와 라라의 딸을 찾아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지만, 원작 소설은 지바고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시작하고 곧이어 아버지의 죽음을 소개하는데요, 작가는 그야말로 소설 서두에서부터 독자들에게 죽음의 돌직구를 던지는 것이지요. 그 이후로도 작가는 지바고의 장모인 안나, 라라의 남편 안티포프를 비롯하여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죽이고 마침내 주인공 지바고까지 죽여 버립니다. 마치 파스테르낙은 체홉의 소설을 그 극단까지 몰고 간 듯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간의 불행에 대한 냉혹한 리얼리스트였던 체홉이 의사였던 것처럼, 수많은 죽음 속에 살아가는 파스테르낙의 주인공 지바고도 의사라는 점입니다. 지바고는 파스테르낙 소설의 주인공인 동시에 파스테르낙의 선배 작가인 체홉이기도 한 것이지요. 실제로 소설에서 지바고가 의사인 동시에 또 체홉처럼 작가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점이 파스테르낙의 작품 세계가 체홉과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체홉은 불행하게 살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작품 밖에서 냉정하게 진단하는 의사였다면, 파스테르낙은 작품 밖에서 진단하는데 그치지 않고 작품 안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동시에 그들을 치유하는 의사이지요. 파스테르낙은 진단만 하는 체홉을 넘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 애쓰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에서 장성한 의사 지바고는 죽어가는 라라의 엄마를 살리면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요, 이후 그는 죽음이 난무하는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립니다. 특히 영화에서는 생략됩니다만, 적군 빨치산에서 군의관으로 일하면서 자기 목숨을 걸고 총상으로 죽어가는 백군 소년병을 몰래 치료하여 풀어주기까지 합니다. 지바고가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점은 의사라는 직업 이외에도 그의 이름 '지바고'에서도 강조됩니다. 러시아말로 지바고는 '살아있는'이라는 뜻의 형용사 '지보가'가 격변화한 것으로 러시아어 성경의 마태복음(16:16)과 요한복음(6:69)에 나오는 '살아있는 신의 아들, Сын Бога Живаго'라는 표현에서 따온 것입니다.

     

    결국 파스테르낙은 지바고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무고한 고통을 감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려고 한 것이지요. 작가는 '인간의 운명은 사랑과 고통'이라고 거듭 말하는데요, 그런데 왜 신도 아닌 인간이 타인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이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왜 타인의 생명을 사랑해야 할까요? 지바고는 소설에서 '타인들 속의 인간이 바로 인간 영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의 정신적 생명, 영혼은 바로 타인이 나를 기억해주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뜻이지요. 즉 '나에 대한 타인의 기억이 나의 생명'이며 그래서 타인을 살리는 것은 곧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통은 곧 모든 제대로 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생명이 곧 기억이라면 이 생명을 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술입니다. 지바고가 시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지바고는 '인생의 폭풍이 당신을 나한테 밀어다 준 것'이라며 라라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데요, 그것은 라라도 지바고와 마찬가지로 당시 러시아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운명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라는 종종 '어째서 나는 이런 운명일까?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모든 것에 가슴 아파하니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이런 라라에 대한 지바고의 사랑은 무엇보다 '시'를 통해 표현됩니다. 시를 통해 그녀를 기억하고 그녀를 살리고 동시에 자신을 살리는 것이지요. 소설의 끝에서 코마 롭스 키에게 라라를 떠나보내고 혼자 바리키노에 남은 지바고는 ‘내 손과 입술이 당신을 기억하는 한 당신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당신의 추억을 우아하고 서글픈 시에 담으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소설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은 지바고가 남긴 25편의 시로 장식되지요, 물론 이것은 영화로는 전달될 수 없었지만요.

     

    영화에서 또 달라진 부분은 지바고가 전차에서 거리를 걸어가는 라라를 발견하고 그녀를 따라 급히 내리다 죽는 대목인데요, 사실 소설에서는 라라가 아니라 1차 대전의 전선에서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을 예견했던 플레리라는 늙은 부인입니다. 파스테르낙은 라라가 아니라 라라에 대한 기억을 살려주는 제3의 인물을 등장시킨 것이지요. 생명=기억=사랑에 대한 작가의 예술관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지요. 그러나 역시 데이비드 린은 명감독임에 분명합니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지바고의 딸과 그의 시집, 즉 지바고에 대한 기억 장면을 영화 맨 앞으로 가져와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기억이며 예술이라는 것을 제대로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겨울에는 닥터 지바고를 다시 감상하며 생명과 사랑, 그리고 기억과 예술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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