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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의 구심력 세계
    2021년 FINANCE 2021. 10. 14. 10:52

    항상 중심을 바라보는 러시아인들의 구심력적인 정신세계가 전제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에 대해 포스팅해볼까 합니다. 그 메커니즘은 한마디로 ‘착각’입니다. 사실은 대중들 스스로가 중심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대중들의 사고 속에서는 중심이 항상 한 발 앞서 주변에 있는 자기들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항상 인간이 태양을 향하지만 눈부신 태양을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항상 태양이 인간들 하나하나를 비추고 있는 것과 같지요.

     

    실제로 근대사에는 이를 활용한 실험이 있었는데요, 바로 유명한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이 그 주인공입니다. 18세기 말 영국 정부는 미국의 독립으로 더 이상 죄수들을 미국으로 보낼 수 없게 되자 늘어나는 죄수들을 수용할 새로운 감옥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벤담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791년 ‘파놉티콘 혹은 감시의 집(Panopticon or Inspection House)’이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파놉티콘’이란 그리스어로 ‘모든 것을 다 본다’는 의미인데요. 한 마디로 간수가 모든 죄수의 방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는 구조의 감옥입니다.

     

    원형으로 만든 건물의 한가운데에는 간수의 방이 있고 주변에는 둥글게 간수의 방을 둘러싼 죄수들의 방이 있는데요,  원형 공간의 또 하나의 핵심 포인트는 불균등한 조명입니다. 간수의 방은 항상 어둡게, 죄수들의 방은 항상 밝게 유지하는 것이지요. 죄수들의 방은 항상 중앙 간수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반면 죄수들은 간수의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이것을 ‘시선의 비대칭성’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덕분에 죄수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항상 간수에 의해서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사실 구조상으로 간수는 한꺼번에 모든 죄수들을 감시할 수 없고 죄수들은 어디에서든 동시에 간수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가운데 불을 끈 이유만으로 죄수들은 자기가 바라보는 중앙의 간수가 마치 항상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는 것이죠. 간수의 입장으로는 참으로 효과적인 장치입니다. 죄수들이 중앙을 바라보는 구심력의 구조이지만 죄수들의 인식 속에는 간수가 자기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감시하고 있는 원심력의 구조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죄수들은 간수가 항상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실제로 간수가 자기를 바라보든 아니든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감시에 굴복하고 있는 것이죠. 원형구조와 빛을 사용한 참으로 효과적인 통제 장치인데요.

     

    그런데 벤담이 이 기발한 ‘파놉티콘’의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바로 러시아입니다. 제레미 벤담은 당시 러시아에서 해군선을 건조하고 있던 자신의 동생 새뮤얼 벤담을 방문하고 ‘동생의 아이디어를 빌려 자신이 치장만 한 것’이 파놉티콘이라고 말합니다. 러시아에서 포템킨 왕자를 도와 해군 조선소를 책임지게 된 새뮤얼 벤담은 수많은 러시아의 비숙련 노동자를 소수의 숙련 노동자들이 효과적으로 관리 감독할 수 있는 작업장 구조를 고안한 것입니다. 이 체제가 러시아에서 성공하자 1806년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더 1세는 이 파놉티콘의 구조를 기술학교(Okhta school of Arts) 건물에도 적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럼 러시아에서 성공한 파놉티콘은 영국에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벤담은 자기의 아이디어를 발표한 다음 해인 1792년 정식으로 영국 정부에 수천 명 수용 규모의 파놉티콘 감옥을 제안하고 1794년에는 의회의 공식적인 동의를 얻었고 1799년에는 밀뱅크라는 곳에 1만 2천 파운드를 들여 부지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벤담의 성공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정부로부터의 지원이 끊겼고 당황한 벤담은 정가의 연줄을 통한 청원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모든 게 허사로 끝났습니다. 결국 1811년 영국 정부는 벤담에게 공식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포기한다는 통보를 하였는데요, 무려 20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벤담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개인적으로 국왕 조지 3세가 자기를 미워하여 꾸민 음모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심사위원회의 공식 발표는 이와는 좀 다른 데요, 파놉티콘이 죄수의 노동을 이용한 경제적 이익에 의존하고 있고 감옥의 주인이 죄수를 착취하고 악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가장 큰 반대의 이유였습니다. 벤담은 애초에 파놉티콘이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국가와 계약을 통해서 운영하는 사설감옥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개인 운영자는 죄수 한 명당 정부로부터 12파운드의 보조금을 받고 다만 죄수에 대한 착취를 방지하기 위해 파놉티콘에서의 죄수 사망률이 전국의 죄수 평균 사망률보다 높을 경우 죄수 1인당 5파운드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벤담은 더불어 ‘건달을 정직하게 만들고 게으름뱅이를 부지런하게 만드는 공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파놉티콘은 정부의 보조금 외에도 죄수의 노동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물론 그 첫 번째 운영자는 벤담 자신이 되려고 했지요. 개혁적인 공공 감옥을 만들려고 했던 영국 정부에게는 바로 이 죄수의 노동 착취에 대한 우려가 파놉티콘을 포기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러시아와 영국의 결정적인 차이였지요. 여전히 전제정치가 유지되던 러시아에서는 정권에 절대복종하는 농노 출신의 노동자를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그런 노동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지배하는 중앙의 감시에 익숙한 러시아 노동자, 그리고 이러한 통치에 익숙한 러시아 황제와 귀족으로 구성된 구심력의 세계인 러시아와는 달리 영국은 이미 그것이 불가능한 원심력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파놉티콘, 그것은 러시아에서만 가능한 벤담의 헛된 러시아식 꿈이었지요. 벤담이 제안한 파놉티콘은 100년이 지난 후에 유일하게 제정 러시아에서 실제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 9개 연방관구로 나누어져 관구마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별도의 대통령 대행이 마치 간수처럼 호령하는 푸틴의 러시아도 마치 하나의 거대한 파놉티콘이라고 볼 수 있지요. 러시아에서 파놉티콘은 현실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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