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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
    2021년 FINANCE 2021. 10. 14. 08:57

    오늘은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을 소개하겠습니다. 도스토옙스키 하면 학창 시절 워낙 필독해야 할 고전이라 읽고는 싶었지만, 방대한 양과 무거운 철학적 담론들 때문에 부담스러워했던 기억이 나실 겁니다. '죄와 벌'도 예외는 아니지요. 가난한 법대생 라스꼴니꼬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창녀 소냐를 만나 회개하게 된다는 줄거리 외에는 너무 심오하고 무거운 소설이었다는 기억 만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실 겁니다.

     

    그러나 나이가 좀 들어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되면 대부분의 생각처럼 그렇게 힘든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탐정소설처럼 박진감 넘치는 구성도 재밌지만 무엇보다도 사실은 작가가 거대한 철학을 장황하게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소설 속 주인공들을 통해 ‘인생의 진리는 훨씬 단순한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요. 무시무시한 살인 사건은 사실 이 단순한 진리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게 위한 과장법에 불과합니다. 그럼 먼저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였다고 밝힌 다음 질문에 여러분도 답해 보시겠습니까?  < 당신이 지금 동전 한 푼 없는 가난한 대학생이라고 상상해보라. 그런데 한 마법사가 다가와 묻는다. 저 멀리 중국 어딘가에 다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관리가 있는데, 당신이 바로 이 자리에서 '죽어라'라고 한마디만 하면 그는 죽고, 당신은 백만 달러를 받게 될 것이다. 사실 그가 어느 도시에 있는지도 아무도 모르고 당신이 그에게 죽으라고 하는 말도 세상 어느 누구도 듣지 못한다. 자, 당신은 '죽어라'는 말을 하겠는가?” >

     

    어떻습니까? 이 중국 늙은이는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이고 여러분이 아니어도 결국 누군가는 '죽어라'라고 말할 것이 뻔합니다. 어떤 직접적인 행동도 필요 없고 그저 눈 한번 질끈 감고 말만 한마디 던지면 백만 달러가 손에 떨어집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 질문은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작가 발자크의 1835년 소설 <고리오 영감>의 한 부분입니다. 소설의 배경인 1819년은 프랑스혁명의 발발,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 브루봉 왕조의 부활이 있었던 격동기였는데요. 모두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이념을 외칠 때 왜 발자크는 이런 뜬금없는 질문을 했을까요?

     

    그런데 이로부터 약 30년 뒤에 씌어진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도 비슷한 질문이 반복됩니다. 시장이 된 장발장에게 자베르가 말하죠. “당신을 장발장이라고 의심한 것을 용서해 달라, 진짜 장발장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발장은 갈등에 빠집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감옥에 갈 부랑자가 대신 감옥에 가고, 자신은 가엾은 판틴의 딸을 살리고 또 다른 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데 굳이 자백을 해야 할까 하는 갈등이죠. 그런데 이 소설의 배경도 역시 발자크의 소설과 비슷한 시기로, 프랑스 혁명 이후 다시 군주정이 선포된 뒤 일어난 1838년 '6월 혁명'이었습니다.

     

    앞의 프랑스 작가들은 희생당할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한 명은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이고 또 한 명은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감옥에 들어갈 사람입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주인공도 그저 말 한마디 내뱉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 말 안 하면 되는, 어쨌든 편안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처지도 그리 극단적이지 않은데요, 그저 이런 상황에 놓였다고 상상을 하거나 아니면 죄수에서 시장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돈 많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 선택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제로 고리오 영감의 대학생도 레미제라블의 장발장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희생을 선택하지 않는 고상한 모습을 보입니다.

     

    레미제라블이 등장한 지 겨우 4년 뒤에,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극단적이지요. <죄와 벌>에 등장하는 주인공 라스꼴니꼬프는 그야말로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손을 뻗으면 방의 모든 벽이 닿는 붙박이장 같은 다락방에 살면서 월세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폐병환자이며, 사랑하는 누이는 돈 때문에 불한당에게 팔려갈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러시아 최고의 법대에 다니는 최고의 지성인 데다 돈도 없으면서, 죽은 술주정뱅이의 장례식 경비를 책임지는 착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편에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이자 불쌍하고 착한 여동생을 착취하는, 이미 늙을 만큼 늙은 노파가 있습니다. 당구장에서 당구나 치며 노는 젊은 이들까지도 이 쓸모없고 못된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많은 사람을 위해 쓰는 게 훨씬 나을 거라는 농담을 할 정도이지요. 선택을 앞둔 주인공은 절박하기 그지없고 희생당할 대상은 죽어 마땅한 존재입니다. 게다가 여기에 거대한 이념적 정당성까지 주어집니다. 바로 프랑스혁명입니다. 그것도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극단적으로 형상화한 나폴레옹이 핵심입니다. 당시 러시아 청년들에게 나폴레옹은 신격화된 영웅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의 인간은 오직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요.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한 영웅’ 아니면 몸에 기생하는 이 같이 보잘것없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나폴레옹에게는 집단살인도 범죄가 아닙니다. 보다 더 큰 대의, 즉 인류 전체의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살인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없어져도 전혀 지장 없는 벌레 같은 군중이 있습니다.

     

    라스꼴니꼬프에게 벌레 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이는 것은 자신은 벌레가 아니라 나폴레옹일 수 있다는 이념적 실험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영웅이 가지는 '실행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뒤에는 ‘대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허용’되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이 든든하게 받쳐주기 때문이지요. 당연히 우리의 주인공은 노파를 죽입니다. 앞서 프랑스 작가들의 주인공이 하지 못했던 일을 러시아 사람은 해낸 것입니다. 바로 ‘타인의 희생’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가 상황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프랑스 작가들이 꾸물대며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을 분명하게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념이라도 타인의 희생을 합리화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본성에 위배된다’는 것이죠. 작가는 프랑스 주인공들이 하지 못한 것을 러시아 주인공이 끝까지 해내게 함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스꼴니꼬프는 사실 살인을 하기 전부터 그에 대한 계획만으로도 너무나 힘들어합니다. 살인을 합리화하는 이념이 주인공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짐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 살인 현장에서 죄 없는 노파의 여동생까지 죽이게 되면서 프랑스혁명 이념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몇 사람은 죽어도 괜찮다’는 공리주의나 ‘모든 가치의 기준은 오직 '나'’라는 극단적인 자유주의는 결국 살아있는 모든 타인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죠.

     

    도스토옙스키가 이해하는 인간은 그렇게 복잡하고 거창한 이념과는 관계없는 존재입니다. 그저 가까운 타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게 가장 행복한 존재입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창녀 소냐를 만난 후라스꼴니꼬프가 갱생하게 되는 이유는 그 자신도 본래는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소냐의 주정뱅이 아버지의 고통에 가장 아파하던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인은 모두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도스토옙스키는 전당포 노파와 함께 그의 착한 여동생을 같이 죽게 만든 것이죠. 결국 이 악독한 노파를 죽이는 것은 착한 여동생을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죄와 벌>에서 ‘죄’는 프랑스혁명 이념의 죄였고 ‘벌’은 이 이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고민이 도스토옙스키에게서도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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