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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국민 술, 보드카와 해장
    2021년 FINANCE 2021. 10. 14. 08:49

    세계 건강보건기구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 사람들의 1인당 알코올 섭취량은 1년에 15.76ℓ로 몰도바, 체코, 헝가리에 이어 4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 자체 조사에서는 18ℓ가 넘는 것으로 나올 뿐만 아니라,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밀주가 44%를 넘는다고 하니, 실제로는 러시아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신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왜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 것일까요? 작년 초 러시아의 유명한 유전자 연구소에서 아주 재밌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러시아인의 유전자를 판독한 결과, 알코올 분해 효소를 만드는 '데히드로게나아제'라는 탈수소 효소가 더 많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혹독한 추위를 잘 견디기 위해서 독한 술을 즐겨 마시는 줄만 알았는데, 실제 로는 몸도 받쳐 주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러시아 사람들의 술사랑은 가장 즐겨 마시는 국민주 '보드카'로 대표됩니다. 보드카는 러시아 어원 상 '작은 물'이라는 뜻으로 러시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생명의 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아라비아에서 발명되어 술이 아닌 부상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인데요. 14세기 말에 이를 손에 넣은 러시아인들은 알코올 농도를 대폭 올리고 대중화시켜 러시아 민속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러시아의 추운 날씨를 이겨내기에는 깔끔하면서도 독한 보드카가 제격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도수가 거의 80도를 넘는 경우가 많아서 유럽인들이 이를 맛보고 '넋이 빠지고 눈에서 불이 난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는군요.

     

    보드카가 이토록 독한 이유는 만드는 방법에 있습니다. 한차례의 증류에 의해 만들어지는 럼, 브랜디, 위스키 등과는 달리, 연속 증류법, 즉 다단계 증류에 의해 만들어지는데요. 비등점이 다양한 불순물들이 제거된 다음 자작나무의 숯으로 여과되어 매우 순도 높은 <무색, 무미, 무취>의 알코올입니다. 하지만 과거 80도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도수를 자랑하던 보드카는 대중화와 대량생산을 거치며 도수가 다소 낮아졌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보드카의 도수는 40도에 맞춰져 있지요.

     

    그런데 왜 하필 40도일까요? 많은 분들이 원소주기율표 창안자인 세계적인 러시아 화학자 멘젤리예프의 제안에 의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알코올 도수 40도가 가장 사람의 몸에 적정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실제적인 이유는 과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직 알코올 도수 측정기가 개발되지 않았을 때, 러시아 정부가 보드카의 품질을 검사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보드카에 불을 붙여, 알코올을 증발시킨 후 남는 물의 양을 확인하는 것이었죠. 본래 양에서 반 정도의 물이 남으면 정품 보드카로 판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세기 후반에 알코올 측정기가 등장하면서, 정품 보드카의 알코올 도수가 38.3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수에 따라 주세를 부과하던 러시아 정부는 계산상 편의와 주세 증대를 위해 도수를 40도로 살짝 올려 발표했죠. 여기에는 운반 과정에서 도수가 떨어지더라도 정품 보드카의 기준인 38도 이상을 유지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보드카가 세계적인 술로 알려진 계기도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보드카를 생산하던 보드카의 명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스미노프 가문입니다. 러시아 황실뿐만 아니라 스페인, 스웨덴, 노르웨이 황실로 진상할 정도였죠. 러시아 혁명 이후, 후계자 블라디미르 스미노프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파리 근교에 보드카 공장을 만듭니다. 하지만 다른 술에 비해 아무런 색깔도 맛도 향도 없고 독하기만 한 보드카는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죠.

     

    그러던 1937년, 기가 막힌 우연이 보드카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당시 스미노프 보드카의 생산 및 판권은 Heublein사의 사장 죤 마틴이 가지고 있었는데요. 바를 운영하던 그의 친구가 너무 많이 구입한 진저에일을 처리할 방법을 찾던 중 보드카와 섞어 보기로 한 것이죠. 무색, 무취, 무향의 보드카는 진저에일과 라임을 만나 최초의 칵테일, 'Moscow Mule', 일명 '모스크바의 노새'로 재탄생됩니다 처음엔 라임과 진저에일의 상큼함과 청량감을 맛보지만, 뒤에 숨은 보드카 때문에 갑자기 취기가 돌아 마치 '노새 뒷발에 차인 기분'이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죠.

     

    칵테일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필두로 블러디 메리, 스크루 드라이버 등 보드카를 베이스로 한 칵테일이 붐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보드카의 판매량은 급증했고, 대표 브랜드인 Smirnoff는 세계 제일의 보드카 판매를 자랑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러시아판 '트로이의 목마' 혹은 '러시아의 혼과 미국 실용주의의 환상적인 만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색, 무미, 무취라는 약점을 가장 중요한 강점으로 바꾼, 발상의 전환이 낳은 흥미로운 결과였죠.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 사람들은 칵테일보다는 보드카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러시아 파트너와 회식을 할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40도 보드카를 직접 마셔야 하는 경우가 생길 텐데요. 이럴 경우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습니다. 첫 잔은 무조건 원 샷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러시아 사람들은 보통 원샷을 즐깁니다. 러시아 말로 '다 드나'라고 하면서요. '바닥까지'라는 말인데 우리말과 발음도 뜻도 비슷하지요?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오랜 풍습 때문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손님을 초대했을 때 우애를 다지기 위해 '형제의 잔'이라 불리는 하나의 잔에 술을 돌리는데요. 먼저 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인이 한잔을 다 비우고 손님들은 이 집에 남은 악귀를 남김없이 다 몰아낸다는 뜻에서 반드시 잔을 다 비워야 했습니다. 지금도 이 전통이 남아 첫 잔은 반드시 비우게 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완전한 건강을 빈다는 의미도 있으니 여러분도 반드시 지켜주는 게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독한 보드카를 원샷으로 마신 후, 해장은 어떻게 할까요? 우리 같은 해장국은 없지만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해장 방법이 있습니다.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 보드카나 맥주로 해장술을 한잔 하거나, 숙취가 심할 때는 이렇게 냉수마찰을 합니다. 보기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추워 보이죠? 러시아인들에게 이 눈밭 냉수마찰은 종교적 정화의 의미도 있습니다. 곧 연말을 맞이하여 여러분들도 송년회 자리가 많으실 텐데요. 우리가 그렇듯, 러시아인들의 술자리에서도 건배사가 빠지지 않습니다. 건배 제안자는 잔을 돌리고 상황에 맞게 위트와 재치가 넘치는 건배사를 하는데요. 이번 송년회에서는 러시아식으로 색다른 건배사를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건강을 위하여, 자 즈다로비예!' '우리를 위하여, 자 나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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