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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적인 음식, 누룽지
    2021년 FINANCE 2021. 10. 11. 08:17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청나라 황제 중 한 사람은 천하제일의 요리로 누룽지를 꼽았습니다. 바로 청나라 제4대 황제로 무려 61년 동안이나 중국을 다스린 인물, 강희제입니다. 자금성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면서 이 세상의 진귀한 음식은 모두 먹어봤을 강희제가 왜 ‘천하제일’의 음식으로 누룽지를 꼽았을까요?

     

    어느 날 강희제가 변복을 하고 지금의 중국 장쑤성 쑤저우 일대를 시찰하다 그만 식사 때를 놓쳤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농가를 찾아가 먹을 것을 청했는데 그 집에도 마침 남은 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변복을 한 강희제의 모습이 가엾게 보였는지 농가 아낙네가 가마솥에 남아 있던 누룽지를 뜨겁게 데운 후 야채 국물을 부어 내왔습니다. 누룽지에 국물을 부을 때 나는 ‘타다닥’ 소리와 함께 풍기는 구수한 냄새가 배고픈 황제의 식욕을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맛있게 식사를 끝낸 강희제가 종이에다 “땅에서 한바탕 천둥소리 울리니 천하제일의 요리가 나왔네”라는 글을 써서 아낙네에게 건네줬습니다.

     

    누룽지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된 기본 조건은 물론 강희제의 시장기였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가 고프면 아무리 하찮은 음식도 산해진미 못지않습니다. 하지만 요리사들이 누룽지 덕분에 황제의 친필족자를 받은 아낙네의 행운을 부러워만 했다면 중국의 유명한 요리인 누룽지탕은 탄생하지 않았겠죠. 요리사들은 단순한 누룽지에다 전복, 새우, 버섯을 넣어 맛을 더했습니다. 그리고 누룽지의 고소한 풍미와 씹는 식감을 살렸습니다. 또 누룽지에 소스를 끼얹을 때의 ‘타다닥’ 하는 맛있는 소리까지 합쳤습니다. 그래서 누룽지탕을 눈, 코, 입은 물론이고 귀까지 즐거운 감성 요리로 발전시켰습니다.

     

    우리는 누룽지를 다른 방법으로 이용했습니다. 누룽지 자체가 아닌 누룽지를 끓인 숭늉 문화를 창조했습니다. 누룽지가 있었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일본과 달리 차 문화가 아닌 숭늉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요즘은 식후 디저트로 과일을 먹거나 커피, 차를 마시지만 옛날 우리 조상들은 반드시 숭늉을 마셔야 제대로 식사를 끝낸 것으로 여겼습니다. 숭늉은 우리에게 소화제와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동의보감에서는 체했을 때 누룽지를 달인 물인 숭늉을 소화제로 처방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숭늉을 좋아한 역사는 뿌리가 아주 깊습니다. 12세기에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이라는 책에서 “고려 관리들은 하인을 시켜 머리에 그릇을 이고 다니게 하면서 수시로 숭늉을 마신다”며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누룽지를 응용하면 고급 요리도 될 수 있고, 차를 대신하는 소화촉진 음료도 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누룽지는 밥 지을 때 불 조절을 잘못해 쌀을 태워 만들어지는 부산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누룽지에 대해서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고소한 맛의 누룽지를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찮은 식품으로 여겼습니다. 과거주부들에게 누룽지는 정말 골칫거리였습니다. 식구가 먹을 양식도 부족했던 시절, 밥을 태운 누룽지는 양식을 축내는 주범이었던 것이죠. 누룽지로 모자란 식량을 보충해야 했기에 물을 부어서 숭늉을 만들었고, 누른 밥은 언제나 어머니들의 몫이었습니다.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詩經)에도 누룽지는 하찮은 음식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심을 잃는 것은 눌은밥으로 음식 대접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이 성호사설에 해설을 남겼습니다. “내가 여종들이 상전을 비난하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제사나 잔치가 끝난 후에 남은 음식을 썩도록 쟁여 두면서 나누어 주지도 않는다고 두고두고 뒷말을 하더라”며 후학들에게 하찮은 음식 때문에 인심 잃는다며 시경에 나오는 누룽지의 교훈을 기억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누룽지가 별 볼일 없는 식품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누룽지에 대한 오해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만큼 마치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우리 고유의 전통음식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룽지는 쌀 문화권에는 골고루 퍼져있는 식품입니다. 밥을 짓는 방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누룽지는 세계적인 식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누룽지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는 오고게(おこげ), 중국에는 꿔봐(鍋巴), 베트남에는 껌 짜이(Com Chay)라는 누룽지가 있습니다. 유럽에도 누룽지가 있습니다. 스페인의 누룽지 소카 라트(Socarrat)입니다. 특히 서양식 볶음밥이라고 할 수 있는 빠에야(Paella)를 만들 때 프라이팬 바닥에 눌어붙어 바삭바삭한 누룽지인 소카 라트를 스페인 사람들은 우리가 누룽지를 좋아하는 것 못지않게 즐겨 먹습니다. 그런데 스페인 향토음식인 소카 라트가 최근 미국, 특히 뉴욕에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굳이 스페인이나 히스패닉계가 아니더라도 미국인들 사이에서 스페인 누룽지, 소카 라트 만드는 법이 관심을 끌고 있고, 빠에야 전문 식당에서는 아예 소카 라트를 별도 메뉴로 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 전 뉴욕 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는 “소카 라트야말로 누룽지의 향긋함과 바삭함이 어우러진 빠에야의 최고 걸작품’이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서양 버전의 ‘천하제일 요리’로 스페인 누룽지가 뉴요커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는 겁니다.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누룽지가 요즘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중국 누룽지탕은 진작부터 천하제일의 요리라는 스토리텔링과 함께 여러 나라에서 고급 요리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베트남 누룽지 역시 명품 베트남 요리로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누룽지도 뉴욕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누룽지의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각국의 누룽지가 각축전을 벌이는 것 같습니다. 누룽지 열국지에 우리의 구수한 누룽지, 우리 숭늉도 한 자리를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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