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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정왕후 어보의 귀환
    2021년 FINANCE 2021. 10. 11. 06:54

    우리 문화재는 당연히 우리 땅에 있어야겠지요. 그러나 일본의 국권 침탈, 한국전쟁 등 수난의 역사를 겪으면서 이 땅의 수많은 문화재도 함께 약탈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만 약 16만 여점이며, 개인 소장품까지 합치면 최소 45만 여 점이 넘는 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돌아왔을까요? 협상을 해서 찾아오거나, 기증받을 것을 모두 합치면 겨우 9천 여 점에 불과합니다.

     

    2017년, 67년 동안의 타국살이를 끝내고 귀향한 문화재가 있습니다. 바로 조선왕실의 보물인 문정왕후 어 보인데요. 어보는 국왕이나 왕비를 위해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존호를 높여 축하해주기 위해 만든 의례용 도장입니다. 조선 제11대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의 어보는 높이 6.45㎝, 사방 10.1㎝로 위에는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조각되어 있고, 바닥면에는 문정왕후의 존호인 ‘성열 대왕대비 지보(聖烈大王大妃之寶)’가 새겨져 있는데요. 조선시대 왕권과 왕실을 상징하는 인장이자, 당시 금보 제작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역사적,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재입니다.

     

    지금은 어보가 국립 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지만, 1990년대까지는 모두 종묘에 있었는데요. 이 어보 중 무려 47개가 도난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언제였을까요? 1950년, 한국전쟁 때인데요. 당시 미군이 ‘문정왕후 어보’를 포함한 문화재를 마음대로 가져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67년 만에 문정왕후 어보가 돌아오게 된 것일까요?

     

    문정왕후 어보의 환수 과정은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처음 문정왕후 어보의 존재가 드러난 건 2000년인데요.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주립 박물관인 라크마에 금/은 등으로 제작된 조선의 문정왕후 어보가 소장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소장 경위를 알아보니 라크마 박물관 측도 수년 전 개인에게서 구입한 것이었는데요. 한국문화재의 도난품 임이라며 반환 요청을 했지만 미국 라크마 박물관 측이 ‘문정왕후 어보가 도난품임을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오라’ 고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벼랑 끝에서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문화재 환수팀이 기록 찾기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집요한 추적 끝에 마침내 2009년 미국 메릴랜드 국가기록원에서 결정적인 자료 하나를 발견하는데요. ‘1950년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들에 의해 종묘의 어보 47 과가 약탈되었다’ 바로 1950년 당시 미군의 어보 약탈을 알게 된 양유찬 주미대사의 요청으로 미국 국무부가 자체 조사에 나선 후 남긴 보고서를 찾아낸 것입니다. 이 소중한 기록 덕분에 문정왕후 어보를 찾는 일은 새로운 반전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4년 간의 오랜 노력 끝에 2013년 7월 11일, 3명의 한국문화재 공동대표단이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라크마 박물관에 도착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1차 협상을 가졌는데요. 자리에 앉자마자 미국 국무부 보고서를 보여줬고, 라크마 박물관 측은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황당하게 “그렇다면 이 어보가 종묘에 있었던 것을 밝히라” 며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논쟁 끝에 9월 중순 2차 협상을 하기로 하고 돌아서는 찰나였는데요. 갑자기 그들이 문정왕후 어보를 보고 가라며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마침 라크마 박물관 한국관이 수리에 들어가 어보가 수장고에 있었는데, 직접 보여 줄 수 있다고 한 건데요.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문정왕후 어보 반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신의 한 수가 될 줄이야.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요?

     

    그들은 박물관 수장고로 당당하게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어보를 직접 본 순간, 뭐랄까요... 63년 만에 생사도 몰랐던 자식을 만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참 벅차고 먹먹한 순간이었습니다. 겨우 겨우 어떻게 만난 자식인데 그저 눈으로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보를 만져 봐도 되냐고 물었고, 그들도 흔쾌히 허락을 했는데요. 한자로 희미하게 ‘육 실 대왕대비(六室 大王大妃)’라고 적혀 있는 겁니다. 육실은 종묘 정전의 6번째 방인 중종(中宗)의 공간이고, 대왕대비는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를 말하는 것인데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문정왕후 어보가 종묘에 있었다는 증거를 가져오라며” 생떼를 쓰던 그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10여 년이 넘도록 어보를 간직하고 있던 그들도 전혀 보지 못했던 글자였는데요. 이것이 운명처럼 그날 마침 우리 눈에 보인 것이지요. 그리고 문정왕후 어보를 찾아오는데 가장 강력하고 결정적인 증거가 됐습니다.

     

    이후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2개월 뒤인 2013년 9월 19일, 미국에서 라크마 박물관측과 다시 협상이 시작됐는데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그들은 “한국이 제시한 자료와 자체 조사로 어보가 도난품임을 확인하였으니 대한민국으로 돌려주겠다”라고 약속했습니다. 4년 여에 걸친 문정왕후 어보 환수운동의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국민들이 한 마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은 덕분에 미국 정부기관을 상대로 승리한 의미 있는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는데요. 이후 미국 검찰에서 도난 과정을 재확인하는 과정을 3년여 거친 끝에 마침내 2017년, 문정왕후 어보가 67년 만에 고국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혹여 그런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문화재 찾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문화재를 되찾는 것은 단지 유물을 되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를 복원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잃어버린 문화재는 영원히 잊히게 됩니다. 이제는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이며, 역사의 흩어진 조각을 맞추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정왕후 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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